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9. 다게스탄의 사자 (The lion of Dagestan) 中. 다르고

 

 


   나는 평범한 산민에 불과하다. 그러나 코카서스의 산맥은 우리에게 러시아에 대적할 힘을 주었다.

                              

                                                                                -  이맘 샤밀

 


   거칠고 호전적인 산민들을 체계적인 군으로 편성한 샤밀은 거침없는 기세로 러시아군의 요새를 함락시켜 나갔다. 1840년 말 아훌고 탈환을 시작으로, 코카서스 평야 지대의 러시아군 요새를 하나하나 함락시켰다. 러시아군의 점령 하에서 '경작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요새 건설과 도로 확장의 노역에 시달리며 혹독한 세금에 신음하던 산민들은 샤밀의 항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샤밀의 군세는 1만에 달했으며, 그 하나하나가  사격과 검술 - 산민들은 킨잘(kinzhal)이라는 단검을 즐겨 쓴다. - 의 전문가이자, 승마술에 있어서 궁극으로 단련된 기병이었다.

 

 

 

 

 

   산민들은 우리의 정예병과 코사크인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기병이었다. 말 등에서 나고 자란 그들의 승마술은 그야말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들 산민들에게 있어서 군사적 자질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였다. 왜냐하면 그런 자질이 없는 한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어떠한 친분도 가질 수 없었고, 웃음거리가 됬으며, 심지어 여자들에게도 비웃음을 사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코카서스 전쟁을 지휘했던 러시아군 사령관 중 한명인 벨리야미노프의 회고다.

 


   이 탁월한 기병들이 평야지대에 쏟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군은 뭔가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1841년, 플로 장군의 원정대가 테레크강가의 체첸 평야지대를 휩쓸었다. 하지만 이는 역효과를 낳았고 평야 지대의 산민들이 자신들의 보호를 위해 샤밀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샤밀은 러시아군의 위협에 대처하였고 폴로는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결국 1842년,  골로빈 백작은 사태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

 

   이후 새로 코카서스 지역 러시아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알렉산더 네이드가르드 (Aleksander Neidgart)는 샤밀을 잡아오면 그의 목의 무게 만큼의 황금을 주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고, 산민들은 계속해서 평야지대의 요새를 하나하나 함락시켰다. 당시 1만의 샤밀의 부대는 한 곳의 요새를 공격하고 불과 24시간 만에 80킬로 떨어진  다른 러시아군 요새를 공격할 수 있었다. 탁월한 승마술에 지형 정보까지 숙지하고 있는 산민들의 기습을 러시아군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1843년, 러시아군은 체첸 전역과 다게스탄 대부분의 지역에서 병력을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네이드가르드 백작 역시 이듬해 전임자와 똑같이 물러나게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격노하였다. 코카서스 지방이 평정되었다는 휘하 사령관들의 보고를 받는 데 익숙했던 그에게 샤밀의 신정국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시 산민들의 소굴을 함락시키고 불태울 것을 명했다. 이리하여 1845년 7월 18일,  보론쪼프 백작은 샤밀의 신정국가 수도인 다르고를 함락시키기 위해 1만 1천의 러시아군을 이끌고 출발하였다.

 

 

 

미하일 보론쪼프 백작

 

 

   샤밀은 러시아군의 공격하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김리와 아훌고에서 살아남은 자였다. 그래서 수도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군의 포위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대신에 샤밀은 다르고를 모두 불태워버리고 노약자들을 피난시켰다.

 

  보론쪼프 백작은 거의 저항없이 다르고까지 쉽게 진군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불타고 재만 남은 마을이었지만, 어쨌든 산민들의 수도를 점령하였다. 수도에 있는 황제에게 그렇게 전갈을 보냈고, 니콜라이 1세는 '성공적인 원정'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러시아군에게 모든 것이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샤밀이 불태우고 간 다르고 마을에는 식량이 없었고, 러시아군은 점차 보급이 떨어져 갔다. 보론쪼프는 식량 공급을 요청하였고, 수송대를 보호하기 위해 분견대를 보냈다. 다르고 주변의 울창한 산림에서 망원경으로 러시아군을 주시하고 있던 샤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기다린 순간이 온 것이다.

 

  보론쪼프를 위한 식량을 전달받기 위해 분견대는 마을 외곽의 산림지대를 지나야 했다. 하지만 숲 속에서 체첸인 저격수들이 러시아군을 하나하나 저격하였다. 러시아군이 저격수를 격퇴하기 위해 진격하면, 다른 쪽의 숲에서 체첸인들이 배후를 공격했다. 어느 새 사방에서 체첸인들이 공격을 가했다. 러시아군은 점차 당황하게 되었고, 곳곳에서 체첸인들이 검을 들고 달려와 베어넘겼다.

 

 

 

 

  견디다 못해 러시아군이 다르고에 있는 본대와 합류해야 했다. 샤밀의 기습에 의해 러시아군은 556명의 전사자와 85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더욱 심각한 상황은 식량이 떨어졋고 보급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보론쪼프는 그제서야 샤밀의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7월 25일, 그로즈니 요새로 철수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코카서스의 숲속을 가로질러 철수한다는 것은 러시아군에게는 지옥같은 일이었다. 이제 그들의 눈에는 숲의 나무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적으로 보였다. 체첸인들의 러시아군 행렬의 전후좌우 어디든지 마음대로 기습하였고, 밤에는 사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러시아군은 규모도 알 수 없는 산민들에게 둘러쌓인 채 공포에 떨어야 했다. 매일 수십명이 죽었으며, 부대는 와해된 채 수많은 군수물자가 산민들에게 노획되었고, 심지어 대포까지 뺐겼다. 마침내는 장군들까지 손에 검을 쥐고 산민들과 싸워야 했다.

 

  러시아군은 필사적으로 활로를 찾았지만, 산민들이 매복한 험한 산길을 대부대가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들은 그로즈니의 프라이타그 (Freitag) 장군에게 구조대를 요청하였다. 어느새 개인당 총알이 60발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구조대가 오지 않는 한 1만여명의 러시아군은 산민들에게 전멸할 위기였다.

 

 

 

코카서스 전쟁의 러시아군

 

  이 절체절명의 순간, 샤밀은 급보를 받았다. 자신의 아내인 파티마가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나이브 들에게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 샤밀은 아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자기 아내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전선으로 달려왔다. 불과 하루 만의 일이었다.

 

  프라이타그의 구조대가 바로 그 시점에 보론쪼프의 본대와 합류하였고, 산민들은 새로운 러시아군 대병력이 몰려오자 물러서고 말았다. 샤밀은 분노를 참지 못한 채 그의 부하들에게 일갈하였다. 눈 앞에 다가온 승리도 잡지 못한 겁쟁이라는 것이었다. 샤밀은 러시아군을 파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에게 그것은 충분히 심각한 패배였다. 보론쪼프 백작이 그로즈니에 간신히 돌아오고, 자신의 1만여명의 병력 중에 사상자가 4천명에 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에는 3명의 장군과 200여명의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가 코카서스 지방에서 겪은 가장 처참한 패배인 이 전투가 바로 다르고 전투다.

 

   이 무렵 샤밀의 신정국가는 최정점을 달렸다. 그의 광신적인 무리드들의 열의와, 그에 대한 산민들의 확고한 지지와, 러시아군의 뚜렷한 사기 저하가 이를 가능하게 해줬다. 이 시점에서 샤밀은 전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바로 산맥 서쪽에서 이슬람교의 깃발아래  러시아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또다른 산민들인 체르케스인과의 연대였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Imam_Shamil
           http://en.wikipedia.org/wiki/Caucasian_War
           http://en.wikipedia.org/wiki/Viceroyalty_of_the_Caucasus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amina.com/article/jihad_imamshamyl.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0&ELEMENT_ID=42384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697&ELEMENT_ID=67729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by jager | 2009/07/07 12:27 | 트랙백 | 덧글(0)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8. 다게스탄의 사자 (The lion of Dagestan) 上. 아훌고

 

 

 

 .... 생과 사를 막론하고 그의 말은 곧 법이었으며, 그의 깃발 아래 산민들은 모두 러시아에 대항해 죽음으로써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 Lesley Blanch의 The sabres of Paradise 중에서

 

 

 

   3대 이맘 샤밀. 그는 그때까지 존재했던 모든 성전과 투쟁의 이론을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코카서스를 넘어 유럽과 미국에까지 퍼졌으며, 심지어 그가 대적해서 싸운 러시아에게도 경외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전설은 아직까지도 코카서스 일대에서 회자되고 있다.

 

   전설은 1대 이맘인 가지 무하마드가 피살된 1832년 김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산민들의 두목인 무하마드를 죽이기 위해 수십개 마을을 불태운 뒤에 김리를 에워쌓았다. 그곳에서 이맘은 전사하고, 그의 주위의 60명의 무리드들도 하나하나 죽어갔다. 러시아군은 한명한명씩 처치하면서 김리를 불태우고 있었고,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다.

 

  "...바로 그 때, 우리가 포위했던 탑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매우 키가 크고 강단있게 생긴 자였다. 마치 우리에게 무기를 잡을 시간을 주는 듯이, 그는 잠시 우리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그는 우리를 향해 놀라운 속도로 달려오더니, 겹겹이 에워쌓던 우리 부대의 제 1열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를 향해 사격하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는 사이에, 왼손에 검을 쥔 채 마주치는 병사들을 베어나갔다.

    자신의 탈출을 막으려는 우리측 병사 3명을 벴지만, 4번째 병사가 그 자의 가슴팍을 총검으로 쑤셔버렸다. 하지만 그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은 채 총검을 자기 가슴에서 뽑아버렸다. 그걸로 그 병사를 베어버린 뒤에 다시 도약을 해서 뒤에 있던 병사들을 넘어버렸다. 그런 뒤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러시아군 장교의 회고다. 그 산민이 바로 샤밀이었다.

 

 

 

김리 전투

 

 

  감자트가 피살된 1834년, 샤밀은 다게스탄에서 3대 이맘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전임자가 산민들의 피의 복수에 피살되었던 것처럼, 그들은 이맘이라고 해서 순순히 휘하에 집결하지 않았다. 특히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것에 결코 익숙치 않았던 체첸인들은 이맘에게라도 그리 고분고분한 자들은 아니었다. 이는 이맘으로 선출될 당시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타수 하지라는 체첸인이며, 그의 협조를 얻고난 뒤에야 비로소 체첸인들이 샤밀의 항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샤밀은 러시아와 싸우기 전에 먼저 산민들을 하나의 깃발아래 집결시키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쪽의 붉은 선은 19세기 초의 러시아 영역. 파란 색은 서쪽 체르케스인, 자주색은 카바르다인, 노란색은 오세티아인, 녹색은 체첸과 다게스타인의 영역 

 


  그리하여 샤밀은 1837년까지 전임자들이 추구했던 '토착법을 이슬람 율법으로 정착'시키는 일에 몰두하면서, 체첸과 다게스탄의 여러 부족들을 하나하나 집결시켰다. 러시아 황제는 또다시 모반의 기운이 이는 것을 느끼고, 샤밀에게 직접 대면하여 협상할 용의를 보였다. 샤밀은 이슬람 율법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러시아군이 철수하고, 자신을 산민들의 지배자로 인정하면 자신도 러시아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겠다는 협상안을 보냈다. 그러나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러시아 황제는 그루지아에서 몇몇 산민을 만났을 뿐이었다.

 

 

 

 

 

  러시아는 샤밀과 협상할 수 없다면, 더 위험해지기 전에 토벌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839년, 글라세 백작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3대 이맘을 죽이기 위해 중부 다게스탄으로 향했다. 또다시 마을 하나하나가 함락되었다. 러시아군이 처음 함락시킨 아실타라는 마을에서는, 2천의 무리드들이 러시아군에게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코란에 맹세하였다. 러시아군은 한명의 포로도 잡지 못하고 모두 죽였다고 한다. 이런 전투를 수도없이 겪은 뒤에 러시아군은 그 해 6월 29일, 샤밀의 본거지인 아훌고를 포위하는 데 성공한다.

 

 샤밀은 이곳에서 러시아군의 막대한 병력과 근대식 병기를 상대로 무려 80일을 버텨낸다. 아훌고는 3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지고, 가운데 협곡으로 둘로 갈라진 마을이었다. 협곡 사이는 20미터의 나무 다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에 러시아군을 피해 산으로 도피했던 수많은 부녀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샤밀에게 충성하는 '나이브 (보좌)'들과 수천명의 무리드들이 있었다.

 

  러시아군의 첫 공격은 험한 절벽을 기어 올라가다가 산민들이 떨어뜨린 돌과 불타는 통나무에 맞고 350명이 전사하였다. 러시아군은 4일 동안 후퇴한 뒤에 대포를 끌고와서 마을의 목책들을 겨냥했다. 하지만 목책이 가루가 되어도 절벽을 넘어서 산민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번번히 실패하였다. 글라세 백작은 작전을 바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3개 절벽을 연달아 공격해서 요새의 산민들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첫번째 러시아군의 공격은 체첸 저격수들의 사격으로 삽시간에 장교들이 모두 전사하게 되자, 600명의 전사자를 내고 실패하였다. 두번째 러시아군의 공격은 체첸인들이 암석을 굴리면서 격퇴시켰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이 세번째 절벽을 향해 공격하였다.  앞서 두차례의 공격에 대응하느라 모든 체첸인 무리드들이 동원되었지만, 남아있는 여자와 아이들이 손에 검을 쥐고 러시아군을 향해 뛰어들고 사력을 다해 싸워서 격퇴시켰다. 산민들 중에 종종 여자들이 싸우는 경우가 있는 데, 워낙 필사적으로 싸우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포로로 잡을 엄두도 못낸다고 한다. 결국 백작이 주도면밀하게 짠 3방면의 러시아군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아훌고 전투

 

 

  이 전투 뒤에, 글라세 백작은 샤밀에게 협상을 요청한다. 샤밀의 아들을 인질로 넘겨주면 러시아군은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의 오랜 포위로 마을 안의 상황은 처참하였고, 샤밀은 찢어지는 마음으로 자신의 8살된 아들을 러시아군에게 넘겨준다. 하지만 아들이 러시아 수도 샹트 페테르스부르그로 이송되는 순간, 러시아군은 포격을 가했다. 샤밀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포격전 끝에 러시아군은 마침내 아훌고를 함락시켰다. 밤새 이동 가능했던 사람들은 모두 탈출하고 마을에는 부상자와 노약자 뿐이었지만, 러시아군은 산민들의 본거지를 함락시킨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 러시아 코카서스 주둔군 사령관 예브게니 골로빈 백작은 아훌고의 함락을 수도에 보고하며, 산민들의 둥지는 파괴되고 러시아에 대항하는 자와 그 추종자들 모두는 말살되었다고 전했다. 러시아 황제는 크게 기뻐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너무나  성급한 생각이었다. 샤밀이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샤밀은 아훌고를 빠져나와 체첸의 남부 산악지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현지 체첸인들을 규합하고 다게스탄의 부족들과 함께 러시아에 대항하는 '신정국가'를 창설한다. 신정국가는 그 동안 이론만이 주창되고 실제 구현되지 못했던 성전의 요소들, 즉 산민들을 규합시킬 이슬람 율법의 제정과 모든 피의 복수의 금지, 율법의 법정에 근거한 사법 통치를 하기 위해서였다.

 

  샤밀은 다게스탄과 체첸의 60만 산민들을 자신의 깃발 아래 규합시키고,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현실에 맞게 변형한 '샤밀의 법전' - 니잠을 창안한다.  이는 당시로서는, 특히 유럽에 비해 낙후되었던 코카서스 산악지대로서는 놀랄만큼 혁신적인 법안이었는 데, 예컨데 도둑에 대하여 이슬람 율법은 '오른손을 절단하라'고 되어있지만 니잠에 따르면 3개월의 구금에 처하게 되어있었다. 또한 관습에 따르면 '피의 복수'를 통해 해결할 문제를, 니잠에서는 구금과 벌금형으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 '니잠'에서는 군사, 행정 분야의 규정도 제정되었다. 우선 신정국가는 수십개의 '나이브스트보 (지구)'로 분류하였고, 이 지구에 이맘 샤밀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나이브 (보좌)'와 이슬람 율법을 재판하고 판단하는 '카지 (성직자)'를 두었다. 행정상의 최고 책임과 지역의 군사 문제는 '나이브'가 책임지고, 종교적인 판단이 필요한 문제나 지역의 이슬람 포교와 행사는 '카지'가 담당하였다. 이 양자의 충돌이 있을 경우에는 샤밀이 직접 개입하여 해결하였다. 이외에도 일반 민법과 형법 규정까지 두고 있었다.

 

 

샤밀의 '나이브'들

 

 

  또한 샤밀은 국민개병제를 실시하여, 모든 신정국가의 15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자들은 병역의 의무가 있었다. 유사시에는 모든 의무자들이 동원되고, 평시에는 열 집 중에 한 집에서 한명의 장정이 복무하면, 나머지 9집에서 그 장정의 복무 비용을 부담하는 형태였다. 이런 제도를 통해 샤밀은 거칠고 제멋대로인 산민들을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인으로 만들 수 있었고, 그의 깃발 아래 1만에서 1만 5천의 병력을 항시 보유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아훌고의 함락으로 크게 기뻐하며 잠시 코카서스 지방에서 관심을 돌린 사이에, 샤밀은 이와같은 군사 행정 체제를 완비하였다. 러시아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잘 정비되고 조직된 샤밀의 군대가 1840년 말에 아훌고를 다시 함락시킨 뒤의 일이었다. 때마침 코카서스 산맥 서쪽, 흑해 연안의 체르케스인의 반란에 직면한 러시아는 사태가 매우 심각해졌음을 깨달았다.

 

 

 이제 코카서스의 산민 토벌전은 국가대 국가의 혈전으로 바뀌었으며,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이래 최대의 전쟁을 하게 되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Imam_Shamil
             http://en.wikipedia.org/wiki/Caucasian_War

             http://en.wikipedia.org/wiki/Viceroyalty_of_the_Caucasus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amina.com/article/jihad_imamshamyl.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0&ELEMENT_ID=42384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697&ELEMENT_ID=67729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by jager | 2009/07/04 17:14 | 체첸의 늑대들 | 트랙백 | 덧글(2)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7. 이맘들의 나라

 


가지 무하마드의 고향, 다게스탄 김리

 


 

산민들을 굴복시켜라. 굴복시킬 수 없다면 말살하라.

-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

 

 


  가지 무하마드. 그는 첫번째 이맘(Imam)이다. 이맘이란 '종주(宗主)'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 정치, 행정, 종교 특히 군사에 있어서 최고 권한을 갖고 있는 신정국가의 수장이었다.

 

  당시 북카프카즈에 전래된 이슬람교는 수니파에서 파생된 수피즘이었다. 수피즘은 두가지 이질적인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개인의 구도를 통한 신에의 합일 (타리카)을 추구한다는 신비주의적인 요소와, 이슬람 공동체에 대한 평등 의식과, 사회 지배 권력의 핍박에 대한 저항적인 요소였다.

 

  1820년대에 수피즘을 전파했던 시대에는 이 두가지 요소에 대한 대립이 존재하였다. 전자를 타리카 뮤리디즘, 후자를 나이브 뮤리디즘이라고 불렀다. 무리디즘이라는 뜻은 수피즘 특유의 스승 (무르시드)과 제자(무리드)의 절대복종 관계를 의미한다. 북카프카즈의 뮤리디즘은 절대권력자 이맘을 스승으로, 그 휘하 종교적인 신념으로 단련된 무장들을 제자로 한 군사적 이데올로기였다.


   처음 수피즘이 전파된 시대에는 개인의 구도를 중시하는 타리카 무리디즘의 요소가 강했다. 본래 수피즘의 구도가 궁극에 달하면 신과의 합일 이외의 일체의 관심사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대 가장 권위있는 종교지도자인 마고메드 야라스키는 러시아의 혹독한 탄압 아래의 구도는 무의미하다고 선언하였다. 특히 예르몰로프의 가혹한 통치는 초기에 구도를 추구하던 마고메드에게 성전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무슬림들은 이교도의 통치 아래 있어서는 안되며, 강력한 국가에 예속된 노예가 되서도 안된다."  그의 피를 토하는 듯한 열변은 수피즘의 또다른 얼굴인 사회 저항적인 요소가 북카프카즈에 정착이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다게스탄에서 수피즘을 배운 가지 무하마드가 자신의 고향 김리에서 열변을 토하였다. 러시아의 혹독한 탄압과 가혹한 수탈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우선 코카서스인들의 대동단결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씨족과 부족별로 제각각인 관습법을 포기하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받아들여야 하며, 씨족 사이의 피의 복수 (Kanli)는 이 샤리아 법정에서 공정하게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부족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대승적 차원에서 결합할 때에만 신이 그들에게 러시아를 무찌르는 승리를 내려줄 거라는 것이다. 과거 세이크 만수르가 제시했던 길을 따라, 그는 성전의 길을 제시하였다.

 

  가지 무하마드의 열변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인들은 결코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서는 안되며, 그들에게 종속된 한 어떠한 기도, 금식, 헌금, 순례도 의미가 없다."


   김리의 모스크에서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 코카서스의 첫번째 이맘으로 추대된 가지 무하마드는 이제 성전의 때가 도래했다고 선언하였다. 때는 1829년, 코카서스에서 최초의 신정국가 수장이 탄생하였다.

 

   다게스탄에서 시작된 성전은 곧 코카서스의 각지에서 호응을 얻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와 페르시아를 완전히 몰아낸 상태로, 이제 외부의 위험 요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하여 샹트 페테르스부르크의 전략자들의 눈에는 그곳은 이제 확고히 다져진 러시아의 영역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서쪽의 체르케스인과 동쪽의 체첸, 잉구쉬, 다게스탄의 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가지 무하마드는 체첸인들에게 세이크 아바달라 아슐티를 보내 자신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하였다. 산민들 중에서 체첸인들이 가지 무하마드의 성전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830년, 가지 무하마드는 자신의 휘하에 1만 2천명의 열성적인 산민들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그의 휘하 부하 중에 가장 핵심은 고향 친구인 샤밀과 다게스탄 훈자흐 출신의 감자트였다. 가지 무하마드는 이 병력으로 체첸과 다게스탄의 러시아 거점들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특히 키즐레이, 그로즈니, 브네자프나야가 핵심 거점이었다.

 

 

러시아 코카서스군 사령관 이반 파스케비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예르몰로프의 후임이자 러시아 코카서스군 사령관 파스케비치는 산민들에게 포고를 내렸다. 가지 무하마드는 '시국 혼란자'이며, 그에게 체첸과 다게스탄 산민들은 협력하지 말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파스케비치는 오스만 투르크를 격파하여 최종적으로 코카서스에 대한 러시아의 우위를 확보하게 되는 전쟁의 사령관이었고, 당시 차르 니콜라이 1세에게 다음과 같은 전갈을 받는다.

 

  코카서스의 산민들을 굴복시켜라

  굴복시킬 수 없다면 말살시켜라

 

  이는 당시 산민들에 대한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입장이자, 향후 수백년 동안 본질적인 면에서 결코 변함이 없는 러시아의 대 코카서스 정책을 함축한 표현이기도 하다.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 (재위 1825 ~ 1855)


   가지 무하마드의 첫번째 공격은 1831년, 다게스탄의 남쪽 고개인 데르벤트를 노린 것이었다. 험준한 산악 요새에 대한 첫번째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가지 무하마드는 신속하게 병력을 움직여서 테레크 강의 저지대의 중요한 거점이자, 세이크 만수르가 공격하다 실패했던 요새 키즐레이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 다게스탄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타르쿠와, 현 잉구세티아 수도인 나즈란 요새도 함락시켰다. 러시아의 코카서스 산맥 동쪽의 방어망에 큰 구멍이 뚤렸다. 러시아는 파스케비치 사령관을 교체하고 그리고리 로젠 남작을 코카서스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832년, 가지 무하마드는 요새 주변의 러시아군에게 포섭된 마을들에 대한 공격과 함께, 나머지 러시아 요새인 그로즈니, 블라디카프카즈 (현 북 오세티아의 수도), 브네즈파나야 (현 체첸의 동쪽)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브네즈파나야에 대한 공격은 요새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그 요새에 주둔했던 로젠 남작에게 증원군을 요청하게 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500명 이상의 코사크 분대가 급파되었다.

 

 

 

  무하마드의 무리드들은 코사크 병력을 산악지대로 유인했다가 매복 공격을 가하였다. 이 공격은 크게 성공을 거둬서 코사크 분대는 3분의 1의 사상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하지만 이미 함락시킨 요새 주변의 산민들의 비협조와, 로젠 남작의 추가 병력이 집결하여 산민들을 압박하자 가지 무하마드는 다게스탄으로 후퇴하여야 했다.

 


  로젠 남작은 2만의 러시아군으로 체첸과 다게스탄의 산악지대를 쑥밭으로 만들면서 가지 무하마드를 추격하였다. 러시아군은 마을 하나하나를 함락시키면서 그의 고향 김리를 향했는 데, 각 마을들은 결코 쉽게 손을 들지 않았다. 추오므케스켄트 마을에서, 러시아군은 155명의 무리드들을 죽이는 데 4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심지어 츠소리(Tsori)라는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이 산악 고개를 돌파하는 데, 단 2명의 체첸인 저격수에게 러시아군 4천명이 3일 동안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병력은 산민들의 저항을 뚫고 마침내 1832년 10월, 가지 무하마드를 그의 고향 김리에서 포위할 수 있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러시아군은 61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민들을 죽였다. 가지 무하마드는 김리에 60명의 무리드들과 같이 있었고, 그들은 2개의 요새 속에서 농성하였다.

 

   러시아군은 무리드들의 질긴 저항을 뚫고 마침내 가지 무하마드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초대 이맘이었던 그는 카펫에 앉아서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르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런 상태로 러시아군이 자기를 죽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드들도 러시아군의 공격에 하나하나 죽어갔고, 60명 중에 단 2명이 살아서 탈출한다.

 

 

김리 전투. 이곳에서 가지 무하마드는 전사한다.


 가지 무하마드의 뒤를 이은 2대 이맘은 그의 한팔이었던 감자트 벡 (Hamzat bek)이었다. 그는 우선 내부 조직을 정비하고, 그 다음에 외부의 러시아를 상대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1833년, 감자트는 러시아에게 만약 산민들에게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준수하도록 한다면 러시아와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물론 러시아가 이를 거절할 것을 알고, 잠시 시간을 끌기 위한 책략이었다. 러시아는 이에 응답도 하지 않았다.

 

  감자트는 자신의 신정국가가 정착이 되기 위해서는 코카서스 산민들의 유력자, 특히 다게스탄의 여러 한 (몽고의 칸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여러 다게스탄의 부족의 족장급들을 의미한다.) 들의 권한을 박탈하고 자신의 깃발 아래 집결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1833년에 다게스탄 아바르 족의 영역을 공격하여 4명의 한을 죽였다.

 

  하지만 이 조치는 다게스탄의 몇몇 유력 가문의 '피의 복수'를 불렀고, 결국 감자트는 이듬해인 1834년 9월, 금요 예배를 위해 들어선 모스크에서 암살되고 만다. 당시 감자트를 암살한 자가 바로 '하지 무라드'였다. 그는 아바르족의 한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피를 갚아준 것이다. 그리하여 2대 이맘은 코카서스 산민들의 피의 복수로 인해 죽었다.


  러시아는 1대 이맘인 가지 무하마드가 5년의 긴 전쟁 끝에 전사하고, 이어서 2대 이맘도 어이없이 죽자, 코카서스 산민들의 저항도 그리 오래 끌지 않으리라 기대하였다. 투쟁의 구심점이 연달아 사망하였고, 내부 분열 조짐도 상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 서로 살벌한 피의 복수가 오고가던 산민들이 대동단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대 이맘이 선출되었다. 그는 세이크 샤밀 (Shaykh Shamil)로, 가지 무하마드의 고향 친구이자 김리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2명의 무리드 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이제 코카서스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러시아 제국에게,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또한 유럽인들에게 약소민족이 대 제국을 상대로 어디까지 싸울 수 있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Ghazi_Mollah
            http://en.wikipedia.org/wiki/Gamzat-bek
            http://en.wikipedia.org/wiki/Caucasian_War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0&ELEMENT_ID=42384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http://varvar.ru/arhiv/gallery/battle_art/rubo/

by jager | 2009/04/11 10:45 | 체첸의 늑대들 | 트랙백 | 덧글(0)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6. 성전 (Ghazawat)

 

 

 

   세이크 만수르 우슈르마.  수백년에 걸친 체첸인들의 대러시아 항쟁 최초의 주모자


  그의 이름은 아직도 체첸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으며, 톨스토이의 소설 '하지 무라드'에도 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 만수르는 진정한 성인이었죠. 그가 거리를 돌아다닐 때는 사람들이 모두 그 옷에 입을 맞추고 자신들의 죄를 참회했다고 합니다.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으며 서로 흘린 피도 잊었다고 합니다."

                                                                                                                     - 하지 무라드 中에서

 


   러시아의 코카서스 장악이 시작되려는 시점에 등장한 그의 출신에 대한 확실한 정설은 없다. 심지어 로마 교황의 파문을 당한 이탈리아 수도승이라는 말까지도 있다. 그러나 가장 신빙성있는 설은 알다 마을 태생의 체첸인으로, 양치기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수피즘 신도라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순간, 스스로의 이름에 '승리자 (만수르)'라는 칭호를 붙이며 산민들에게 성전을 부르짖었다.

 


  당시 체첸의 산악지역에는 아직 이슬람교가 뿌리내리지 않았으며, 토착신앙을 믿고 자신들의 관습법인 '아다트'를 따르고 있었고, 각 씨족 (teip) 들 사이의 피의 복수가 난무하고 있었다. 체첸인의 전설에는 닭 한마리로 시작된 피의 복수로 인해 두 씨족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그들의 복수는 철저하였다. 이는 러시아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단결하여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가 되었다.

 


   만수르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이슬람교가 정착이 된 다게스탄에 가서 수피즘 낙슈반디 형제단에서 율법을 공부하였다. 거기서 이슬람 법전인 '샤리아'에 대해 교육을 받고 돌아온 그는  러시아에 대한 성전 (하자바트) 를 부르짖으며, 승리의 열쇠는 코카서스 산민들의 대동단결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존의 관습법을 이슬람 율법 샤리아로 대처하고, 씨족들 사이의 피의 숙청도 금지하고 이를 샤리아 법정에서 판결하며, 술도 마시지 말고 담배도 피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서쪽의 체르케스인부터 동부의 다게스탄인까지 모든 산민들이 이슬람교의 기치 아래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코카서스 산민들의 복장. 가슴의 원통은 본래 총알을 넣어두는 용도였다고 한다.

 

 
 코카서스의 산민들은 그의 주장에 동참하면서, 그가 내걸은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코카서스를 장악하기 위해 요새와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한 러시아는 산민들의 저항을 분쇄해야 했다. 러시아 파견군 사령관인 포템킨 공작은 만수르를 토벌하기 위해 피에리 대령이 지휘하는 연대 병력을 투입하였다.

 

  1785년, 러시아의 토벌대는 만수르가 숨어있다고 알려진 마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만수르는 러시아군의 도착을 예측하고 다른 곳에 병력을 매복하고 있다가 러시아군을 기습하였다. 순자강 기슭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지휘관 피에리 대령과 8명의 장교, 300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2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최초의 성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러시아 분견대를 격파한 만수르는 더 많은 산민들을 휘하에 집결시켰고, 그해 12월까지 서쪽 카바르다에서 동쪽 다게스탄까지 모두 1만 2천명이 모여들었다. 만수르는 이 병력으로 러시아의 요새 키즐라르를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워낙 다양한 곳에서 몰려들어서 통일성을 갖추기 힘든데다가, 엄격한 이슬람 규율아래 복종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자기 씨족 외에는 누구 밑에서 굴복해본 적이 없는 산민들에게는 아직 어려운 것이었다. 러시아 요새를 공격하기 위한 만수르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연이어 카바르다 지역의 요새 공격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하였다.


  그러나 만수르의 성전은 아직 코카서스를 장악하지 않은 러시아에게는 큰 압박이었으며, 예카테리나 여제는 포템킨 공작에게 명령하여 병력을 남쪽 그루지아에서 테레크 강까지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또한 1786년에는 막 건설이 끝난 블라디카프카즈 요새에서도 병력을 뺐으며, 러시아는 이 중요한 거점에 1803년까지 부대를 배치하지 못한다.

 

   산민들의 저항으로 러시아가 잠시 주춤한 틈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다시 러시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하였다. 1787년에 터키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산민들에게도 러시아를 물러나게할 절호의 기회였다. 만수르는 터키로부터 병력과 물자의 원조를 요청하였고, 전선을 코카서스 서북쪽의 체르케스, 아디게인들의 지역으로 옮겼다. 거기서 터키군과 같이 러시아군과 투쟁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에게 기운 힘의 추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오스만 투르크의 능력이 다하였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연합을 맺고 터키를 격파하였다. 또한 만수르의 산민들도 여러차례 러시아를 공격하였지만 번번히 패하였고, 터키군은 코카서스에 많은 병력을 배치할 여력이 안되었다.

 

   결국 세이크 만수르의 최초의 성전은 1791년 7월 3일, 흑해 연안의 터키군 요새 아나파에서 러시아군의 포위 공격에 섬멸됨으로써 6년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요새에 있던 산민들과 터키군은 사상자 8천, 남녀 포로 1만 3천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또한 모반의 주동자였던 세이크 만수르는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세이크 만수르는 러시아 수도로 압송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3년 뒤에 백해의 차가운 감옥 속에서 죽었다.

 

 

전쟁으로 인해 피난가는 산민들

 

  최초의 성전은 6년만에 끝났지만, 세이크 만수르는 향후 수백년에 걸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였다. 그것은 러시아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수많은 산민들이 연합해야 한다는 것과,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공통된 요소인 이슬람교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각자로서 체첸인들에게 기억되며, 1991년 조하르 두다예프가 독립선언했을 당시 체첸 대통령궁 앞의 광장 이름은 '세이크 만수르 광장' 이었다.


 

   만수르가 죽고 잠시 한숨을 돌린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1796년 죽고 파벨 1세가 즉위한다. 1801년에 남쪽의 그루지아 왕국은 주변의 이슬람국의 위험으로 인해 끊임없이 러시아의 도움을 요청하고, 파벨 1세는 그루지아를 러시아 제국에 합병시킨다. 이로써 코카서스 산맥의 북쪽과 남쪽 모두 러시아의 손에 들어온다.

 

   러시아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교훈으로, 코카서스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좀더 확실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코카서스 지방 통합총독부를 설립하고, 산민들을 대상으로 러시아군에 편성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카바르다와 다게스탄 족장들에 대한 회유작업도 병행하였고,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한 흑해 코사크족들을 코카서스 지역으로 점차 이주시켰다.

 

 

 

 

 코카서스 지방의 코사크 인들

 

  가장 중요한 조치로, 러시아는 1817년, 나폴레옹을 격파한 정예병력 4만을 코카서스 지방으로 배치하였고, 그 사령관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이자 러시아 최고의 포병 장교인 예르몰로프를 임명하였다. 그는 코카서스 산민들에 대하여 확실하고도 단호한, 그리고 지속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러시아 예르몰로프 사령관

 

  그는 일부러 공포전술을 통해 산민들을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나의 이름이 산민들로 하여금 우리 요새의 병사들과 우리 병영을 안전하게 놔두게 할 것이다." 그가 체첸인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순자강 연안에 건설한 가장 중요한 요새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로즈니 (공포)'

 

 현재 체첸의 수도이기도 한 그곳에는 구소련 시절 예르몰로프의 동상이 있었다. 또한 그는 토벌 중에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모든 체첸인들이 말살될 때까지 결코 쉬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체첸인의 마을에 대한 잔혹한 공격과 병행하여, 그들이 생업을 할 수 없도록 평야지대에서 점차로 그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요새를 건설하였고, 그들이 게릴라전을 할 수 없도록 나무들을 베어가면서 서서히 산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예르몰로프의 이 방법은 체첸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825년에 체첸인들은 예르몰로프의 전방 거점 하나를 습격하였고, 그의 부하 장군인 그레코프를 죽였다. 또한 그의 가차없는 방식은 산민들에게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1827년에 산민들을 장악하지 못한 책임으로 니콜라이 1세에 의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하여 세이크 만수르가 죽은지 30여년이 지난 뒤, 다게스탄의 어느 아바르인이 또 다시 성전을 부르짖게 하였다.   

 

   그의 이름은 가지 무하마드였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Ghazi_Mollah
          http://en.wikipedia.org/wiki/Aleksey_Petrovich_Yermolov
          http://en.wikipedia.org/wiki/Chokha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amina.com/article/jihad_imamshamyl.html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s'

by jager | 2009/04/10 19:01 | 체첸의 늑대들 | 트랙백 | 덧글(0)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 5. 세 제국 (Three Empire)

 

 


오스만 투르크 제국


  티무르가 자신의 발자취의 모든 민족들을 뒤흔든 지 백년 뒤, 15세기에 들어서자 코카서스 산맥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두 세력이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서쪽의 오스만 투르크와 동쪽의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그들이 각각 산맥의 서쪽과 동쪽에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코카서스 산맥의 서쪽에는 카바르다인과 아디게인, 체르케스인이 있었고, 동쪽에는 다게스탄의 여러 부족들과 바이나흐 (체첸과 잉구쉬) 족들이 살고 있었다.

 

  코카서스 산맥은 7세기부터 남쪽 그루지아 왕국의 영향으로 그리스 정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현재도 오세티아 민족은 주변의 이슬람국가 속에서도 그리스 정교를 믿고 있다. 그러나 티무르의 침략과 투르크,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으로 점차 이슬람교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체첸인들에게 이슬람교의 유입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졌고, 다게스탄이 8세기 경에 이슬람교가 어느 정도 정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첸인들은 토착 종교의 세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15세기의 러시아에게 코카서스는 교역과 여행을 위해 거쳐가는 지점에 불과했다. 인도와 바그다드를 여행하는 러시아인들이 그루지아의 타브리즈에서 그루지아인들과 만났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었다. 코카서스 산맥을 넘보기에 러시아는 이제 막 킵차크 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신생 제국에 불과했다.


16세기

 

  그러나 백년 뒤, 모스크바 대공의 아들 이반 뇌제가 스스로를 '황제 (차르)'라 칭하며 몽골족의 잔존 세력인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복속시키면서 러시아는 코카서스에 발을 디디기 시작하였다.  당시 코카서스 산맥의 카바르다의 족장 중, 템류크와 타쥬르트는 모스크바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들은 동쪽의 다게스탄의 타르쿠 (투르크 계 민족들의 연합체) 의 샴칼 (호족, 족장이라는 뜻) 에 대항하기 위해 신생 제국이었던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러시아가 코카서스 산맥에 개입하게 되는 모든 시초가 된 이 일은 1557년에 발생한다.

 

 

이반 뇌제

 

   코카서스 산맥의 주민의 자발적인 원조와 구조 요청에 의해 이 요충지에 개입하게 된 러시아는 기존의 이슬람 2대 제국, 오스만 투르크와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 각축을 벌여야 하였다. 이리하여 코카서스의 산민들도 이 삼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독립과 안전을 위해 절묘한 줄타기를 하여야 했다.

 

   이반 뇌제는 카바르다족의 템류크의 구원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장차 러시아가 남쪽으로 뻗어가기 위해서는 이 요충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치 군사 동맹이 맺어진 후, 이반 뇌제는 1561년 템류크의 딸 마리아 템류코비나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이 동맹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 오스만 투르크의 사주를 받은 크림 한의 공격으로부터 카바르다 족을 드네프르 하구에서 보호하였다. 또한 1567년, 순자강 서쪽에 러시아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강자의 압박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한다'는 대의 명분과, 족장들의 아들을 러시아에 인질로 들여서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시키는 주도면밀한 책략을 적절히 병행하면서 이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1584년에 죽자, 그의 아들 표도르 1세가 즉위하였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차르를 대신하여 외삼촌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전권을 장악하였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에의 복속을 거부하는 다게스탄 타르쿠의 샴할을 1593년에 카바르다족과 연합하여 공격하였다. 알렉산더 자세킨 공작을 총사령관으로한 러시아군 5천과 카바르다인 1만의 원정군이 타르쿠로 진격하였다. 러시아와 코카서스 민족 사이에 벌어진 이 최초의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3천의 전사자를 내고 군 전체가 와해되는 대패를 경험한다.

 

   러시아는 다게스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페르시아의 샤 아바스에게 중재를 요청하고, 샤는 러시아군의 후퇴를 요청한다. 패배로 위축이 된 러시아군은 병력을 철수시키고 이 지역은 소강상태에 빠진다.

 

  10년 뒤인 1603년, 그루지아는 오스만 투르크와 페르시아의 전쟁으로 인한 혼란 상황에 대한 불안감에 러시아의 원조를 요청한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부흐툴린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7천의 병력을 투입하여 다게스탄의 타르쿠를 점령한다. 하지만 샴칼의 요청을 받은 투르크군이 러시아군을 에워쌓고, 러시아는 협상을 요청하여 철수를 약속한다. 러시아군이 일단 테레크강까지 철수하자, 타르쿠의 샴할은 러시아군을 기습하여 전멸시킨다.


   이로써 코카서스에 발을 디뎠던 러시아의 첫번째 시도는 동쪽의 산민들과 이슬람 제국들의 힘에 막혀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러시아가 다시 이 산맥에 도전하기까지는 1세기가 넘는 기간이 지나야 했다.


18세기 중반

 

  근대 러시아의 기틀을 다졌다는 표토르 대제가 즉위하자, 그는 남쪽의 흑해로의 진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러시아의 오랜 전통이자 야망인, 바다에의 진출을 위한 숙원이었다. 하지만 흑해로 진출한다는 것은 그 지역에 자리잡은 크림 한국과, 그 후견인이자 강대한 세력이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였다.

 

 

표토르 대제

 

  이 충돌이 실현된 것은 1709년, 스웨덴과의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이후였다. 스웨덴의 국왕 카알 12세는 오스만 투르크로 도주하였고 술탄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표토르는 오스만 투르크에게 스웨덴 국왕의 소환을 요청하였고, 거부할 경우 전쟁도 불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양국은 1710년에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에서 오스만 투르크는 러시아군을 참패시켰고 표토르 대제까지 포위하였다.  항복이나 다름없는 굴욕적인 협약에 따라 러시아는 흑해에서 물러서야 했다.

 

  일단 흑해로의 길이 막힌 표토르는 시야를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로 돌렸다. 1721년 페르시아에 복속됬던 레즈기안 족이 중앙아시아의 러시아 상인을 공격하였고 큰 피해를 입혔고, 이미 첩자를 보내 페르시아의 샤하비 왕조가 붕괴 되고 껍데기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표토르 대제는 즉각 병력을 투입하였다.

 

  러시아군은 카스피해 연안을 따라 페르시아 영역으로 쳐들어갔고, 가는 곳곳마다 페르시아 마을들을 함락시켰다. 내란에 의해 거의 무정부상태였던 페르시아의 저항은 없었다. 1723년, 페르시아는 러시아에게 코카서스 산맥 남단의 영역과 카스피해 서쪽 해안 일대를 러시아에게 넘겨준다는 협약을 맺었다.

 

 

페르시아 샤하비 왕조

 

  러시아는 페르시아와의 일을 끝내고 본국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코카서스 동쪽을 거쳐야 했고, 이곳은 지난 세기에도 러시아군을 격파한 적이 있었던 타르쿠의 샴할의 영역이었다. 샴할은 처음에는 러시아에게 협조할 뜻을 보였지만, 러시아가 카스피해 해안에 교두보를 마련하지 못하자 산에 들어가 농성하기로 하였다. 러시아는 요새를 건설하면서 그들을 굴복시키고자 했지만, 산민들을 굴복시키기에는 표토르 대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1725년에 사망하기 때문이다.

 

  표토르의 뒤를 이은 차르 들은 코카서스의 중요성에 대하여 별로 인식하지 못했고, 중앙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이 장악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곳이었다. 질병이 돌아서 카스피해 서안의 러시아 주둔군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페르시아는 나디르 샤의 지휘 하에 국력을 정비하고, 코카서스 지방의 빼앗긴 영역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 러시아가 나흐족을 지칭하는 용어인 체첸 (chechen)은, 1732년 아르군 강을 건너 처음 접했던 나흐족 마을인 체첸 아울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러시아 분견대는 나흐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동쪽으로 후퇴하였다.

 

   1735년, 러시아는 간제흐 조약을 맺고, 10여년 전에 표토르 대제가 장악했던 코카서스와 카스피해의 모든 영역을 페르시아에게 넘겨준다. 이 조약은 4년 뒤에 패전 뒤에 투르크와 맺은 베오그라드 조약 (카바르다족은 중립지역이며, 러시아는 흑해에 해군을 보유할 수 없다.) 과 함께 러시아의 영역이 코카서스의 동쪽과 서쪽의 모든 영향력을 포기해야 했다.  거의 120년 만의 코카서스 산맥을 향한 러시아의 두번째 시도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러시아 제국의 팽창


 18세기 후반

 

 러시아가 다시 코카서스 산맥에 발을 디딘 것은 30년이 흐른 뒤였다. 러시아는 남쪽의 코사크 족들의 개척으로 점차 영역을 넓혀가면, 그 영역에 뒤이어서 요새를 건설하는 방식으로 점점 발을 넓혀갔다.  1763년에 예카테리나 2세는 북 코카서스의 코사크 정착지 중 하나인 모즈독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이 요새는 연이어 건설된 주변의 요새들과 함께 '모즈독 라인'을 구축하였고, 산민들을 정복하기 위한 러시아의 기지가 되었다.

 

 

예카테리나 여제

 

 

  산민들은 늘어나는 코사크 정착지와 러시아 요새에 대해 점차 반감을 갖게 되었고, 과거 복속되었던 카바르다인들은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요새의 제거를 청원하였고, 여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산민들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이 문제의 해결을 부탁하였고, 러시아는 다시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는 번번히 투르크 술탄에게 막혀서 러시아가 물러나야 했던 그 아픈 기억을 떨쳐버렸다. 몰디비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크림 반도를 장악한 여제는 1774년에 투르크와 쿠추크 카이나르지 조약을 맺는다.

 

 

 

러시아가 조약의 성과로 얻게 된 흑해 함대

 

 

  이 조약은 러시아의 숙원이었던 크림반도와 흑해로의 진출을 보장해주었다. 또한 양 제국의 완충지대였던 카바르다인들을 러시아가 완전히 복속시킬 권리를 투르크로부터 얻어냈다. 하지만 코카서스의 산민들은 이 조약에 대해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고, 모즈독 라인에 대한 직접적인 실력행사를 하였다. 몇 개 요새를 습격한 것이다.

 

 1779년 2월, 예카테리나 여제는 포템킨 공작을 사령관으로 러시아군을 코카서스에 투입하였다. 지역의 산민들을 제압하고 새로 얻은 영역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또한 산맥 남쪽에서 같은 그리스 정교국인 러시아의 원조를 애타게 바라는 그루지아까지 영토를 확대시키고, 장차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러시아가  건설한 도로와 방어 요새

 

   이제 코카서스 산민들에게는 북쪽의 제국 러시아의 힘이 확실하게 인식되었다.  강대한 제국 3개의 팽팽했던 균형은 페르시아의 쇠퇴와 오스만 투르크의 패배로 인해 러시아 제국에게 넘어갔다. 1795년에 페르시아가 카프카즈 산맥 남쪽에서 세력을 키워서 러시아가 물러난 경우가 있지만, 일시적인 반등이었을 뿐 이미 힘의 추는 러시아에게 넘어가 버렸다. 산민들에게 남은 길은 러시아에게 굴복하느냐, 저항하느냐 뿐이었다.

 

   바로 이 때, 코카서스의 산민들 사이에서 세이크 만수르 우슈루마 라는 어느 체첸인이 항쟁을 부르짖으며 떨쳐 일어났다.

 

   최초의 성전인 하자바트(Ghazawat)가 시작된 것이다.

 

 

 

 

 

출처 :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0&ELEMENT_ID=42384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http://en.wikipedia.org/wiki/Russian-Circassian_War
          

by jager | 2009/04/07 15:03 | 체첸의 늑대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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